2011/08/23
투표 거부 운동과 헌법 정신
무상급식 관련안 투표일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회 단체 등에서도 투표 운동과 투표 거부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무상급식의 적법성을 따지기 이전에, 민주당을 비롯한 투표 거부론자들은 해당 투표 자체를 "나쁜 투표"로 규정하며 시민들이 투표 참여를 거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대로, 여권과 보수 단체들은 정치적 차원에서 투표를 거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의 근간인 민주주의를 해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투표 참여를 종용하고 있다.
무상급식의 필요성을 제쳐두고, 투표가 의무인지, 또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필수적인 요소인지에 한 번 살펴보자. 사실 한나라당은 예전 제주도지사 재신임투표 운동에서 투표를 거부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 홍보한 적이 있다. 이런 여당의 언행불일치한 점을 들어 여당 세력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당시 한나라당의 주장은 불합리한 것이었나에 대한 답은 들지 못 한다.
우선 확실히 해둘 것은 대한민국의 투표/선거는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의무가 아니라 하는 점이 정치권이 투표 참여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 한다. 다만, 그것이 왜 의무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이 바로 투표인데, 그것이 의무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여당과 보수 단체들의 주장대로 민주주의가 투표로 인해서 성취되는 것이라면, 약 60여년간 투표 참여를 선택으로 해둔 대한민국의 법체계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문제가 있다. 정확하게는 좀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이른바 "유신헌법"이라는 것을 실시하기 위해 국민투표로 헌법안을 부쳤다. 새 헌법은 대통령의 국회의원 직접 추천, 또 대통령의 간접선거 선출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따라서 이 헌법은 시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에서 그 중요한 투표를 거부하고 있으니 그것이 비민주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계엄령 하에서 투표가 시작됐고 찬성 표가 과반수가 되어 유신헌법은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 뒤 1975년에도 유신헌법에 대한 재신임투표를 했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왔다.
유신 헌법 투표가 계엄령 하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헌법뿐만 아니라 투표 과정 역시 비민주적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투표 전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문을 통해 국가 안보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 유신 헌법을 부치게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계엄령 하에서는 국가 안보에 해를 가하는 자들이 즉결심판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실 이는 투표의 탈을 쓴 협박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투표 과정 자체는 매우 합법적이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할 권리가 있으며, 새 헌법 내용이 아무리 비민주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제안될 권리가 있다. 그런 면에서 당시 개헌 투표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 제도의 모습을 그대로 담습하고 있음과 동시에 비민주적이었다(같은 예는 북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국가최고지도자를 선출하는 최고인민회의는 주민들의 직접선거로 선출되지만, 투표 자체는 비밀투표가 아니다)
여기서 유권자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투표 자체가 비민주적이라면 유권자는 그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가? 바로 투표 거부가 해답이다. 반대 투표가 단순히 투표 사안에 대한 반대만을 뜻한다면, 투표 거부는 투표 행위 자체의 부당함에 호소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제도가 잘 정착되었고 시민 의식과 지도자 의식도 훨씬 성숙해있는 상태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투표 거부 행위 자체에 대한 반증은 되지 못 한다. 투표 자체가 비민주적인지 민주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유권자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그것을 비민주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유권자의 판단보다는 권위의 선택이 우위에 있다는 상당히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생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2항은 다음과 같다:"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바로 국민이다. 권위를 만드는 것은 국민이며 따라서 그들의 판단은 전적으로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민주당의 네거티브적 홍보 방식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투표 거부 운동을 두고 비민주적이라고 하는 오세훈을 비롯한 일부 사회 단체들과 정치권 세력은 그들이 되려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해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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